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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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국제 축구 연맹(FIFA)의 제재를 받았으나, 1991년 제재 해제 후 국제 무대에 복귀했다.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 1998년 FIFA 월드컵 첫 출전 등 199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누렸으며, 2010년 자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했으나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이후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3위를 기록하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으며, 2024년에는 2026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팀의 별명은 "바파나 바파나"이며, 주요 선수로는 아론 모코에나, 베니 맥카시 등이 있다. 현재 감독은 휴고 브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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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FIFA 코드 | RSA |
별칭 | 바파나 바파나 |
협회 |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협회 (SAFA) |
연맹 | CAF (아프리카) |
하위 연맹 | COSAFA (남아프리카) |
웹사이트 | safa.net |
감독 | 위고 브로스 |
주장 | 론웬 윌리엄스 |
최다 출장 선수 | 애런 모코에나 (107) |
최다 득점 선수 | 베니 매카시 (31) |
홈 경기장 | 다양 |
FIFA 최고 랭킹 | 16 |
FIFA 최고 랭킹 날짜 | 1996년 8월 |
FIFA 최저 랭킹 | 124 |
FIFA 최저 랭킹 날짜 | 1992년 12월 |
엘로 최고 랭킹 | 21 (9) |
엘로 최고 랭킹 날짜 | 1996년 9월 (1955년 10월) |
엘로 최저 랭킹 | 94 |
엘로 최저 랭킹 날짜 | 2006년 5월 |
유니폼 | |
홈 유니폼 상의 색상 | FFDD00 |
홈 유니폼 하의 색상 | FFDD00 |
홈 유니폼 양말 색상 | FFDD00 |
원정 유니폼 상의 색상 | 03785D |
원정 유니폼 하의 색상 | 03785D |
원정 유니폼 양말 색상 | 03785D |
써드 유니폼 상의 색상 | FFFFFF |
써드 유니폼 하의 색상 | ffffff |
써드 유니폼 양말 색상 | FFFFFF |
경기 정보 | |
첫 경기 | 0–1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1906년 7월 9일) |
최대 점수차 승리 | 0–8 (애들레이드, 오스트레일리아; 1955년 9월 17일) |
최대 점수차 패배 | 1–9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1920년 7월 17일) |
월드컵 정보 | |
월드컵 출전 횟수 | 3 |
첫 월드컵 출전 | 1998 |
월드컵 최고 성적 | 조별 리그 (1998, 2002, 2010)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정보 |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출전 횟수 | 11 |
첫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출전 | 1996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최고 성적 | 우승 (1996) |
CONCACAF 골드컵 정보 | |
CONCACAF 골드컵 출전 횟수 | 1 |
첫 CONCACAF 골드컵 출전 | 2005 |
CONCACAF 골드컵 최고 성적 | 8강 (2005) |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정보 | |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출전 횟수 | 2 |
첫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출전 | 2011 |
아프리카 네이션스 챔피언십 최고 성적 | 8강 (2011) |
COSAFA컵 정보 | |
COSAFA컵 출전 횟수 | 18 |
첫 COSAFA컵 출전 | 1998 |
COSAFA컵 최고 성적 | 우승 (2002, 2007, 2008, 2016, 2021) |
메달 정보 |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 메달: 금메달 연도: 1996 팀: 팀 메달: 은메달 연도: 1998 팀: 팀 메달: 동메달 연도: 2000 팀: 팀 메달: 동메달 연도: 2023 팀: 팀 |
COSAFA컵 | 메달: 금메달 연도: 2002 메달: 금메달 연도: 2007 메달: 금메달 연도: 2008 메달: 금메달 연도: 2016 팀: 팀 메달: 금메달 연도: 2021 메달: 동메달 연도: 2013 팀: 팀 |
2. 역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오랫동안 국제축구연맹(FIFA)의 제재를 받았으나, 1991년 제재가 풀리면서 국제 무대에 복귀하였다. 복귀 이후 빠르게 성장하여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98년 FIFA 월드컵과 2002년 FIFA 월드컵에 연속으로 본선에 진출하며 아프리카 축구의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자국에서 201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하게 되면서 큰 기대를 모았다. 카를로스 알베르토 파레이라 감독을 영입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사임했고, 후임 조엘 산타나 감독 체제에서는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탈락 등 부진을 겪었다.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4위에도 불구하고 성적 부진으로 산타나 감독이 경질되고 파레이라 감독이 다시 복귀했다.
2010년 월드컵 본선에서는 멕시코, 우루과이, 프랑스와 한 조에 속했다. 개막전에서 멕시코와 1-1로 비겼고, 우루과이에게는 0-3으로 패배했다. 마지막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2-1로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 첫 승을 기록했지만, 멕시코와 승점은 같았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개최국이 되었다.[64]
2. 1. 1992년 이전
축구는 19세기 후반 영국 군인들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처음 전파되었다.[8] 초기부터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될 때까지, 남아공의 조직적인 축구는 국가의 인종 차별 정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백인들만으로 구성된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FASA)가 1892년에 설립되었고, 이후 남아프리카 인도인 축구 협회(SAIFA, 1903년), 남아프리카 반투 축구 협회(SABFA, 1933년), 남아프리카 유색인 축구 협회(SACFA, 1936년)가 각각 세워졌다.
1903년,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FASA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와 다시 제휴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토너먼트에 남아공과 풀럼이 초청될 계획도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대신 남아공은 1906년에 남아메리카로 건너가 친선 경기를 치렀다.[9]
남아공 대표팀은 남아메리카에서 총 12경기를 치러 11승 1패를 기록했고, 60골을 넣는 동안 단 7골만 내주었다. 상대팀에는 벨그라노 A.C.,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리가 로사리나 연합팀, 에스투디안테스(BA), 킬메스 등이 있었다.[10] 유일한 패배는 6월 2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시에다드 스포르티바 경기장에서 알루미니에게 0-1로 진 것이었으나, 7월 22일에는 2-0으로 설욕했다.[11] 당시 선수단은 전원 백인이었으며, 공무원, 은행원, 토목기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15명 중 7명은 남아공 태생이었고, 8명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9]
1953년, 남아공은 FIFA 총회에 참석한 4개의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였으며, 이들은 FIFA 집행위원회에 아프리카 대표 자리를 요구하여 얻어냈다.[12] 이를 바탕으로 남아공, 에티오피아, 이집트, 수단은 1956년 아프리카 축구 연맹(CAF)을 창설했다.[12] 남아공 대표 프레드 펠은 창립 멤버로 첫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헌법은 인종 혼합 팀의 스포츠 참가를 금지했기 때문에, 195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는 전원 흑인 또는 전원 백인 팀만 보낼 수 있었다. 이는 다른 CAF 회원국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고, 결국 남아공은 대회에서 실격 처리되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자진 기권했다고도 한다.[13]
1958년 제2차 CAF 회의에서 남아공은 공식적으로 CAF에서 제명되었다. 백인 협회인 FASA는 같은 해 FIFA에 가입했지만, 1960년 8월 FIFA로부터 차별 금지 규정을 준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결국 1961년 9월 26일, FIFA 연례 회의에서 남아공 협회는 공식적으로 자격이 정지되었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 협회 회장이자 남아공의 FIFA 회원 자격을 옹호했던 스탠리 라우스 경은 며칠 뒤 FIFA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라우스는 스포츠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남아공의 FIFA 제명 시도에 계속 반대했다. 그는 남아공의 축구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후, 1963년 1월 남아공의 자격 정지를 해제시켰다.
라우스는 정지가 유지되면 남아공 축구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중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4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FIFA 연례 회의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협회 대표들이 더 많이 참석했고, 이들의 요구로 남아공의 회원 자격은 다시 정지되었다. 1976년 소웨토 항쟁 이후, 남아공은 FIFA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되었다.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다인종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가 결성되었고, FIFA에 다시 가입했다. 이로써 남아공은 이후 FIFA 월드컵 예선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14]
2. 2. 1992년–1994년: 국제 무대 복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제재를 받아 약 20년간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1년 제재가 해제되면서 국제 무대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 7월 7일, 더반의 킹스 파크 경기장에서 열린 카메룬과의 친선 경기를 통해 공식적인 복귀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복귀 후 처음 참가한 공식 대회 예선은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5조에 편성되어 모리셔스, 잠비아, 짐바브웨와 경쟁했다. 모리셔스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고, 모리셔스와 짐바브웨를 상대로 한 홈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는 등 선전했지만, 조 3위에 머물러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어서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도 참가했다. 콩고, 리비아, 나이지리아와 함께 D조에 속했으나, 리비아는 예선 도중 기권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콩고를 상대로 홈과 원정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으며, 나이지리아와의 홈 경기에서는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원정 경기에서는 패배했다. 최종적으로 조 2위를 차지했으나, 다음 라운드 진출 자격은 얻지 못하며 월드컵 본선 첫 진출은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2. 3. 1996년–1998년: 전성기
1996년, 국제축구연맹(FIFA) 재가입 5년 만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자국에서 열린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우승하며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 성과로 FIFA 랭킹 16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우승을 이끈 클라이브 바커 감독이 갑작스럽게 경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조모 소노 감독 체제 하에서 199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이집트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같은 해, 팀은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FIFA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이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월드컵 데뷔전에서 개최국 프랑스에 0-3으로 패배했지만, 이후 덴마크와 1-1, 사우디아라비아와 2-2로 비기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첫 월드컵 출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2. 4. 2000년–2002년: 불안정한 시기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과 199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로 아프리카의 강호로 떠오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트로트 몰로토 감독 체제 아래 200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3위를 차지하며 2000년대를 순조롭게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에서 흔히 나타나던 잦은 감독 교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포르투갈 출신의 카를로스 케이로스가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을 목표로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케이로스 감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200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으로 이끌었으나, 8강에서 개최국 말리에 패배했다. 월드컵 아프리카 예선 E조에서는 1위를 차지하며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비교적 쉽게 확보했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팀 내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케이로스 감독은 결국 사임했다.
월드컵 본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의 전설적인 인물인 조모 소노가 임시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B조에 속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스페인, 파라과이, 그리고 월드컵 첫 출전국인 슬로베니아와 경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를 모았다.
첫 경기에서 파라과이를 상대로 퀸튼 포춘의 극적인 동점 페널티킥에 힘입어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어진 슬로베니아와의 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 첫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승점 4점으로 조 2위를 달리며 파라과이와 슬로베니아에 3점 앞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스페인전은 총 5골이 터지는 난타전 끝에 2-3으로 아쉽게 패배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두 번이나 동점을 만들며 선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같은 시각 열린 경기에서 파라과이가 슬로베니아를 3-1로 꺾었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파라과이(2-1 리드 상황)에 골득실에서 앞서(남아프리카 공화국 0, 파라과이 -1) 16강 진출이 유력했으나, 후반 84분 파라과이의 넬손 쿠에바스가 팀의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최종 결과 파라과이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승점 4점, 골득실 0으로 동률을 이뤘으나, 다득점에서 파라과이(6골)가 남아프리카 공화국(5골)에 앞서면서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조 1위 스페인을 상대로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슬로베니아와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1-3 패배), 다득점 원칙에 따라 아쉽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진 시기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는 베니 맥카시, 션 바틀렛과 같은 걸출한 공격수, 루카스 라데베, 닐 토비 같은 헌신적인 주장 겸 수비수, 존 모쇼유, 닥터 쿠말로 등 창의적인 미드필더, 그리고 마크 피시와 같은 뛰어난 수비수들을 배출하며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 5. 2002년–2006년: 침체기
2002년 FIFA 월드컵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전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침체기를 겪었다. 이 기간 동안 감독이 자주 바뀌었는데, 에프라임 마샤바 (2002~2004), 에이프릴 푸모 (2004), 스튜어트 벡스터 (2004~2005), 테드 두미트루 (2005~2006), 그리고 임시 감독이었던 피트소 모시마네 (2006)까지 총 5명의 감독이 팀을 거쳐 갔다.그러나 잦은 감독 교체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의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과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연달아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특히 2006년 대회에서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심각한 골 결정력 부족을 드러냈다.
가장 큰 좌절은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였다. 아프리카 지역 예선 2조에 속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가나에 밀려 조 2위에 그치며 독일행 티켓을 확보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부진에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SAFA)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감독을 영입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당시 전 잉글랜드 감독이었던 스벤-예란 에릭손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협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2. 6. 2007년–2010년: 2010년 FIFA 월드컵 개최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무득점 탈락하고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실패하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팬들의 국가대표팀 부진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협회는 경험 많은 감독 선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카를로스 알베르토 파레이라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다. 파레이라는 4년간 1억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 규모의 계약을 맺고 2007년 1월 1일부터 감독직을 수행하며,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개최되는 2010년 FIFA 월드컵을 목표로 팀을 이끌게 되었다.그러나 파레이라 감독 체제에서도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조별리그 탈락 등 초기 성적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파레이라 감독은 2008년 4월, 암 투병 중인 아내 간병을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파레이라가 직접 추천한 조엘 산타나가 선임되었다.[15] 하지만 산타나 감독 아래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팀은 창의성과 득점력 부족 문제를 드러내며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등 부진을 거듭했고, FIFA 랭킹도 하락했다. 결국 산타나 감독은 2009년 10월 경질되었고, 파레이라 감독이 다시 복귀했다.
파레이라 감독 복귀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자국에서 열린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4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비록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0-1로 패하고, 3·4위전에서 스페인에 연장 접전 끝에 2-3으로 패했지만, 경기력 향상을 보여주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약팀들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팀과 국민들의 자신감을 높였다.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개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멕시코, 우루과이, 프랑스와 함께 A조에 편성되었다.

개막전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후반 10분 시피웨 차발랄라가 대회 첫 골을 터뜨리며 앞서갔으나, 후반 34분 라파엘 마르케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어진 우루과이와의 2차전에서는 디에고 포를란에게 2골을 내주는 등 0-3으로 완패하며 조별리그 통과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마지막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파레이라 감독이 기존의 수비적인 전술 대신 공격적인 전술을 선택했다. 전반 20분 봉가니 쿠말로, 전반 37분 카틀레고 음펠라의 연속 골로 2-0으로 앞서 나갔고, 후반 25분 플로랑 말루다에게 한 골을 내주었지만 2-1로 승리하며 월드컵 본선에서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열린 경기에서 우루과이가 멕시코를 1-0으로 꺾으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멕시코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루었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조 3위로 탈락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개최국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64]
월드컵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된 파레이라 감독은 감독직 은퇴를 선언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발전을 위한 권고안을 SAFA에 제출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파레이라의 수석 코치였던 피트소 모시마네가 선임되었다.
2. 7. 2012년–2016년: 계속된 부진
새 감독으로 에프라임 마샤바가 부임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표팀의 첫 경기는 2014년 9월 5일 수단과의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A조 원정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시부시소 빌라카지가 두 골(55분, 61분), 봉가니 룬둘라가 한 골(78분)을 기록하며 3-0으로 승리했다.[29] 이어 9월 10일에는 케이프타운 스타디움에서 나이지리아와 홈 경기를 치러 0-0 무승부를 기록했다.[30] 이 두 경기 결과로 FIFA 랭킹이 두 계단 상승하여 67위에 올랐다.[31]10월 11일에는 콩고 원정 경기에서 봉가니 룬둘라와 토켈로 랜티의 후반전 득점으로 2-0 승리를 거두며 A조 선두로 나섰다.[32] 이후 폴로콰네의 피터 모카바 스타디움에서 열린 콩고와의 홈 경기에서는 0-0으로 비겨 조 선두 자리를 지켰다.[33] 이 두 경기를 통해 FIFA 랭킹은 10계단 상승한 57위를 기록했다.[34]
11월 15일, 수단과의 홈 경기에서는 툴라니 세레로(37분)와 토켈로 랜티(54분)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당초 넬스프루이트의 봄벨라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기 2주 전 총격으로 사망한 주장이자 골키퍼 센조 메이와를 추모하기 위해 더반의 모세스 마비다 스타디움으로 변경되었다. 에프라임 마샤바 감독은 이 승리가 4번의 예선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던 고인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승리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나이지리아 원정 경기를 남겨두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는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한 것이었다 (2013년 대회는 리비아가 안전상의 이유로 개최권을 반납하여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진출했다).[35][36]
예선 마지막 경기인 11월 19일 우요의 악와 이봄 스타디움에서 열린 나이지리아 원정에서는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토켈로 랜티가 딘 퍼먼의 패스를 받아 선제골(42분)을 넣고 추가골(48분)까지 기록하며 앞서갔으나 리드를 지키지 못했다. 이 무승부로 인해 나이지리아는 콩고 공화국이 수단을 1-0으로 꺾으면서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마샤바 감독 체제 하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17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또한 마샤바 감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협회(SAFA)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비난, 오만한 태도, 해외파 선수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 여러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세네갈과의 2018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2-1로 승리한 후 징계를 받았다.
2. 8. 2017년–2023년: 유망주 세대
2018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축구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체계적인 개혁과 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는 U-17, U-20, U-23 대표팀을 포함한 유소년 축구의 성공적인 성장에 힘입었다. 이들 유소년 팀들은 아프리카 대회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각 연령대의 월드컵 본선 무대에도 참가했다.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19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에서 나이지리아를 원정에서 2-0으로 꺾는 등 무패로 예선을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했다.[37] 본선에서는 모로코, 코트디부아르, 나미비아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나미비아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조 3위로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했고, 개최국이자 대회 7회 우승팀인 이집트 (모하메드 살라가 소속)를 상대하게 되었다.[38]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카이로에서 열린 16강전에서 이집트를 1-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39] 이후 8강전에서 다시 나이지리아를 만났지만 1-2로 패배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201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고 성적이었다.[40]
몰레피 앤테키 감독 체제 하에서 2021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앤테키 감독은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위고 브로스가 선임되었다.
브로스 감독은 부임 즉시 국가대표팀 개편에 착수하여, 기존 주장이었던 훌라니 흘라츠와요를 포함한 베테랑 선수들을 젊고 유망한 선수들로 교체했다. 골키퍼 론웬 윌리엄스가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퍼시 타우가 부주장을 맡았다.
브로스 감독의 노력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22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 2라운드에서 가나, 짐바브웨, 에티오피아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차전에서 약화된 가나를 홈에서 1-0으로 꺾고 조 1위에 올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최종전에서 전반전 논란이 된 페널티킥으로 가나에게 0-1로 패할 때까지 조 1위를 유지했다. 최종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득점 차로 가나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월드컵 최종 플레이오프 진출에 근소하게 실패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라이베리아를 2-1로 꺾고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진출했다.[41]
2. 9. 2024년: 부활
2024년 1월 코트디부아르에서 열린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Bafana Bafana|바파나 바파나영어는 말리, 나미비아, 튀니지와 함께 E조에 편성되었다. 주력 공격수인 라일 포스터(프리미어리그)와 레보 모티바(메이저 리그 사커)가 각각 정신 건강 문제와 부상으로 대회에 불참하면서 전문가들은 팀의 전망을 밝게 보지 않았다. 말리에게 0-2로 패배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이어진 나미비아전에서 4-0 대승을 거두고 튀니지와 0-0으로 비기면서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16강 상대는 아크라프 하키미 등이 포진한 강력한 우승 후보 모로코였다. 예상을 깨고 바파나 바파나는 모로코를 2-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대회 돌풍의 팀 카보베르데를 만났다. 정규 시간과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0-0으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이 승부차기에서 주장 겸 골키퍼인 론웬 윌리엄스는 상대 키커 5명 중 4명의 슛을 막아내는 놀라운 선방을 펼쳤고, 바파나 바파나는 2-1로 승리하여 준결승에 올랐다. 윌리엄스는 이 활약으로 대회 최우수 골키퍼상을 수상했다.
준결승에서는 나이지리아를 만나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에서 2-4로 패배하여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어진 3-4위 결정전에서 콩고민주공화국과 0-0으로 비긴 뒤 또다시 승부차기에서 6-5로 승리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200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3위를 차지한 이후 24년 만에 거둔 최고의 성적이었으며, 팀 부활의 신호탄으로 평가받았다. 론웬 윌리엄스의 뛰어난 골키핑 능력과 더불어 테보호 모코에나, 스페페헬로 시솔레가 구축한 탄탄한 중원, 그리고 베테랑 미드필더 템바 즈와네의 노련한 경기 운영이 팀 상승세의 핵심 요인으로 꼽혔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결승 나이지리아전 패배 이후, 바파나 바파나는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상승세를 유지했다. 2024년에 치러진 202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 두 경기에서 나이지리아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블룸폰테인의 홈 경기장에서는 짐바브웨를 3-1로 완파했다.
이후 202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에서는 우간다, 콩고, 남수단과 함께 K조에 편성되었다. 홈에서 열린 우간다와의 첫 경기에서 2-2로 비겼으나, 이후 원정에서 남수단을 3-2로 꺾고 홈에서 콩고를 5-0으로 대파했다. 콩고 원정에서는 1-1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우간다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조 1위를 확정, 본선 진출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2024년 11월 19일, 만원 관중이 들어찬 케이프타운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수단과의 예선 마지막 홈 경기에서도 휴고 브로스 감독이 이끄는 바파나 바파나는 3-0 완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2024년을 마무리했다.
3. 팀 이미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독특한 별명, 다양한 홈 경기장 사용, 그리고 상징적인 유니폼과 문장을 통해 팀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팀의 가장 잘 알려진 별명은 '바파나 바파나(Bafana Bafana)'로, 이는 팬들이 붙인 이름이며 "소년들이여! 소년들이여!" 또는 하나됨을 의미하는 "모든 소년들"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별명은 1992년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팬들이 외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상표권 분쟁을 겪었으나 현재는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SAFA)가 소유하고 있다.[42][43]
대표팀은 특정 홈 경기장을 지정하지 않고, 요하네스버그의 Soccer City를 포함하여 프리토리아, 루스테누르크, 블룸폰테인, 더반 등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의 다양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개최한다. 과거에는 케이프타운, 포트엘리자베스 등 여러 도시의 경기장에서도 경기가 열렸으며, 월드컵 준비 기간에는 독일, 홍콩, 잉글랜드 등 해외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유니폼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 상징인 프로테아와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을 기념하는 별이 달린 SAFA 배지가 주로 사용된다. 역대 유니폼 공급업체로는 카파, 아디다스, 푸마, 나이키가 있었으며, 2020년부터는 르 코크 스포르티프가 공급하고 있다.[44][45][46][47][48][49] 현재 주요 후원사는 캐슬 라거이며, 에너게이드, 츠고 선 호텔, Banxso 등도 후원 및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50][51]
3. 1. 별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은 “바파나 바파나(Bafana Bafana)”이다. 이는 팬들이 붙인 이름으로, 응구니어로는 “소년들, 소년들”이라고 직역되지만 실제 의미는 “소년들이여! 소년들이여!”에 가깝다. 다른 해석으로는 “바파나”를 반복 사용하여 선수단, 코칭 스태프, 관중 모두를 아우르는 “모든 소년들”, 즉 우분투 정신처럼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이 별명은 1992년 7월, 더반의 킹스 파크 경기장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카메룬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이 커지자 팬들이 외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남아프리카 신문 ''소위탄(The Sowetan)''의 기자 세 명이 팀을 지칭하는 데 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SAFA)는 처음에 이 이름이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어렵고, 성인 남성 선수들을 '소년'이라 부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 비공식적으로만 사용했다.[42]
1993년, 'Standton Woodrush Ltd'라는 회사가 이 이름에 대한 상표권을 신청하여 의류 품목에 한해 허가를 받았다. 1994년에는 당시 팀의 기술 스폰서였던 'Kappa'가 의류 및 신발 등(25류)에 대해 "Bafana"와 "Bafana Bafana" 상표권을 신청하여 허가받았고, 이후 이 권리는 SAFA에 양도되었다. 1997년 SAFA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 분류에 대해 "Bafana Bafana" 상표권을 신청했다.
SAFA는 자신들이 이름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며 Standton Woodrush Ltd의 상표권 등록 취소를 신청했으나, 1993년 상표법에 따라 SAFA가 법적 구제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 이해관계자로 인정되지 않아 기각되었다.
SAFA는 상표권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항소했지만, 항소 법원 역시 SAFA가 모든 상품 분류에 대한 이름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상표 사용 의도만으로는 등록 우선권이 생기지 않으며, 상표 소유자가 반드시 상표를 처음 만든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2011년, SAFA는 500만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을 지불하고 Standton Woodrush Ltd로부터 25류 및 기타 모든 분류에 대한 "Bafana Bafana" 이름 사용권을 매입했다.[43]
3. 2. 홈 경기장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특정 홈 경기장을 사용하지 않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의 다양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개최한다.
가장 큰 경기장은 요하네스버그 외곽 소웨토에 위치한 94,700석 규모의 Soccer City이다. 자주 사용되는 다른 경기장으로는 프리토리아 외곽의 애터리지빌 슈퍼 스타디움, 루스테누르크 외곽의 로열 바포켄 스타디움, 블룸폰테인의 프리 스테이트 스타디움, 그리고 더반의 모세스 마비다 스타디움이 있다.
과거 경기가 개최되었던 경기장은 다음과 같다.
경기장 이름 | 위치 |
---|---|
엘리스 파크 스타디움 | 요하네스버그 |
요하네스버그 스타디움 | 요하네스버그 |
킹스 파크 스타디움 | 더반 |
올림피아 파크 | 루스테누르크 |
케이프타운 스타디움 | 케이프타운 |
뉴랜드 스타디움 | 케이프타운 |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 | 포트엘리자베스 |
EPRU 스타디움 | 포트엘리자베스 |
로프투스 페르스펠트 스타디움 | 프리토리아 |
오를란도 스타디움 | 소웨토 |
엠봄벨라 스타디움 | 넬스프루이트 |
피터 모카바 스타디움 | 폴로크와네 |
그리콰 파크 | 킴벌리 (노던 케이프) |
얀 스무츠 스타디움 | 이스트런던 (이스턴 케이프) |
버팔로 시티 스타디움 | 이스트런던 (이스턴 케이프) |
오디 스타디움 | 마보파네 |
마마바토 스타디움 | 마피켄 |
애틀랜틱 스타디움 | 윗뱅크 |
올렌 파크 | 포체프스트룸 |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경기를 개최한 적이 있다. 1998년 FIFA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는 독일 바이어스브론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고, 2002년 FIFA 월드컵 준비를 위해 홍콩의 몽콕 스타디움에서 친선 경기를 치렀다. 2006년에는 잉글랜드 런던의 그리핀 파크에서 넬슨 만델라 챌린지 경기를 개최했다. 2010년 FIFA 월드컵 준비 기간에는 독일에서 두 경기를 개최했는데, 비스바덴의 브리타-아레나와 오펜바흐 암 마인의 슈타디온 암 비버러 베르크에서 경기가 열렸다.
3. 3. 유니폼 및 문장
수년에 걸쳐 바파나 바파나는 팀을 대표하는 여러 로고를 사용해 왔다. 특히 유니폼에는 주로 두 개의 주요 로고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주요 국장인 프로테아는 특히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시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 상징으로서 유니폼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팀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 넓은 스포츠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유니폼 왼쪽에 위치한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SAFA) 배지는 보통 위에 별 하나가 있는데, 이는 199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을 기념하는 것이다. 약 10년 전에 도입된, 덜 사용되지만 주목할 만한 문장도 있다. 이 독특한 로고는 경기장 위에 축구 선수로 형상화된 두 개의 별을 묘사하여 팀의 열망과 업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19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국제 축구 무대에 복귀했을 때, 유니폼은 이탈리아 의류 회사인 카파에서 공급했다. 팀은 1998년 FIFA 월드컵까지 카파 유니폼을 착용했다.[44] 1998년 월드컵 이후, 모든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유니폼은 독일 스포츠 의류 회사인 아디다스가 공급했다. 후원 계약은 연간 1400만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45] 남아프리카 축구 협회와의 계약은 2010년 말까지 유효했다.
2011년 6월 7일, SAFA는 새로운 기술 후원사로 푸마를 발표하고 바파나 바파나의 새로운 유니폼을 공개했다.[46][47] 그러나 2013년 10월, 주요 후원사였던 압사가 2013년 12월 계약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후원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고, 일주일 후 푸마도 기술 후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48]
2014년 3월부터 2020년 6월까지 공식 유니폼 공급업체는 나이키였으며, 브라질과의 국제 친선 경기부터 시작되었다. 2020년 6월부터는 프랑스 스포츠 의류 회사인 르 코크 스포르티프가 공식 유니폼 공급업체이다.[49]
현재 팀의 주요 후원사는 캐슬 라거이며, 소규모 후원사 및 공급업체로는 에너게이드와 츠고 선 호텔이 있다.[50] 2022년에는 Banxso가 팀의 공식 온라인 거래 파트너가 되었다.[51]
4. 국제 대회 경력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CONCACAF 골드컵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참가해왔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오랜 기간 국제 축구 연맹(FIFA)과 아프리카 축구 연맹(CAF) 주관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60][65]
FIFA 월드컵 본선에는 총 3번 진출했으나(1998, 2002, 2010), 세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특히 2010년에는 개최국이었음에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해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개최국이 되었다.[59][64][66]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는 두 차례 참가했으며(1997, 2009), 자국에서 열린 2009년 대회에서는 4위를 기록하여 FIFA 주관 대회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대륙 대회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국제 무대 복귀 후 참가한 첫 대회인 1996년 대회에서 개최국으로서 우승을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998년 준우승, 2000년과 2023년 3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북중미 대회인 CONCACAF 골드컵에는 초청팀 자격으로 2005년에 한 차례 참가하여 8강에 진출한 바 있다.
4. 1.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FIFA 월드컵 본선에 총 3번 출전했지만, 세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 1966년부터 1990년까지 FIFA로부터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다.[60][65]FIFA 복귀 후 첫 도전이었던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는 나이지리아에 밀려 탈락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처음 본선 무대를 밟아 덴마크, 사우디아라비아와 비겼으나, 개최국 프랑스에 패하며 조 3위(최종 24위)로 탈락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슬로베니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본선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파라과이와 골득실에서 밀려 조 3위(최종 17위)로 다시 한번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06년 FIFA 월드컵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개최국으로 참가한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멕시코와 비기고 프랑스를 2-1로 꺾었으나, 우루과이에 0-3으로 패배하며 멕시코와 승점은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조 3위(최종 20위)로 탈락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개최국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59][64][66]
이후 2014년, 2018년, 2022년 대회에서는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다.
FIFA 월드컵 본선 기록 | FIFA 월드컵 예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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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 결과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승점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승점 |
1930년 우루과이 | FIFA 비회원국 | FIFA 비회원국 | ||||||||||||||
1934년 이탈리아 왕국 | ||||||||||||||||
1938년 프랑스 | ||||||||||||||||
1950년 브라질 | ||||||||||||||||
1954년 스위스 | ||||||||||||||||
1958년 스웨덴 | ||||||||||||||||
1962년 칠레 | ||||||||||||||||
1966년 잉글랜드 | 출전 자격 박탈 (아파르트헤이트)[60][65] | 출전 자격 박탈 (아파르트헤이트) | ||||||||||||||
1970년 멕시코 | ||||||||||||||||
1974년 서독 | ||||||||||||||||
1978년 아르헨티나 | ||||||||||||||||
1982년 스페인 | ||||||||||||||||
1986년 멕시코 | ||||||||||||||||
1990년 이탈리아 | ||||||||||||||||
1994년 미국 | 예선 탈락 | 4 | 2 | 1 | 1 | 2 | 4 | 7 | ||||||||
1998년 프랑스 | 조별리그 | 24위 | 3 | 0 | 2 | 1 | 3 | 6 | 2 | 8 | 6 | 1 | 1 | 11 | 3 | 19 |
2002년 대한민국/일본 | 조별리그 | 17위 | 3 | 1 | 1 | 1 | 5 | 5 | 4 | 8 | 7 | 1 | 0 | 13 | 3 | 22 |
2006년 독일 | 예선 탈락 | 10 | 5 | 1 | 4 | 12 | 14 | 16 | ||||||||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 조별리그 | 20위 | 3 | 1 | 1 | 1 | 3 | 5 | 4 |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진출[66] | ||||||
2014년 브라질 | 예선 탈락 | 6 | 3 | 2 | 1 | 12 | 5 | 11 | ||||||||
2018년 러시아 | 8 | 3 | 1 | 4 | 11 | 11 | 10 | |||||||||
2022년 카타르 | 6 | 4 | 1 | 1 | 6 | 2 | 13 | |||||||||
2026년 캐나다/멕시코/미국 | 미정 | 4 | 2 | 1 | 1 | 6 | 5 | 7 | ||||||||
2030년 모로코/포르투갈/스페인 | 미정 | 미정 | ||||||||||||||
2034년 사우디아라비아 | 미정 | 미정 | ||||||||||||||
합계 | 3회 진출 (3/15[67]) | 조별리그 (3회) | 9 | 2 | 4 | 3 | 11 | 16 | 10 | 54 | 32 | 9 | 13 | 73 | 47 | 105 |
- 1998년 FIFA 월드컵 명단
- 2002년 FIFA 월드컵 명단
- 2010년 FIFA 월드컵 명단